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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Ѽ탐닉2012/01/29 19:56



설 연휴 때 펭귄도령 회사에서 10만원짜리 신세계 상품권을 선물로 줬다. 지난 추석 땐 이 상품권으로 신한마카펜세트를 샀다며 블로그에 자랑질 한 기억이 난다. 이번에도 이 상품권으로 무엇을 할까 고민하던 끝에 내가 요즘 꽂혀 있는 외국디자인 서적 몇 권을 사기로 했다. 교보문고나 영풍문고 외국서적 코너에 가면 무겁디 무거운 빅사이즈 제본에 컬러가 선명한 사진으로 이루어진 디자인 관련서적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펭귄도령 클레이학원 따라 강남엘 가면 서점으로 직행해 외국 디자인서적들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내는 게 일상이 됐다. 거기엔 갖가지 다양한 색조합과 영감을 주는 색다른 일러스트들과 그림욕구를 자극하는 별별 문양&패턴들이 즐비해서 손에서 책을 놓는 게 아쉬울 정도다. 사고는 싶지만 권당 가격이 기본적으로 5만원을 홋가하므로 몰래 사진을 찍어오거나 눈으로 구경하는 걸로 만족하고 있었다.

<ILLUSTRATION NOW!-4>


근데 그걸 기억해둔 배려심 깊은 펭귄도령이 명절 상품권으로 그 책들 중 두어 권이라도 사보라고 권하는 것이다. 와우. 염치도 쓸개도 없는 나는 좋아서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영풍문고 외서코너로 달려가 평소 찜해뒀던 <FASHION IS NOT ALL>(artpower,2008),<ILLUSTRATION NOW!-4>(TASCHEN,2011) 두 권과 우리나라 일러스트레이터 잠산의 <더 일러스트>(길벗,2011)를 샀다. 들고 오는 동안 무거워서 낑낑거렸지만 집에 와서 비싼 일러스트 책자를 들춰보는 기쁨이라니, 너무 좋아서 입이 찢어질 뻔했다. <FASHION IS NOT ALL>은 티셔츠나 원피스 같은 옷에 그려진 이쁘고 다양한 디자인을 찍은 사진집이고, <ILLUSTRATION NOW!-4>는 독일 타센출판사에서 시리즈로 나오는 세계 일러스트 작가 선집이다. 둘 다 독창적이고 자극을 주는 디자인과 일러스트가 정말 많아서 그림그리는 일에 권태가 찾아들면 두 책을 펼쳐보며 실컷 자극받아야지, 하고 생각 중이다. 그런 생각만으로도 행복하고 배가 부르다.   

  <FASHION IS NOT ALL> 

우리나라 일러스트레이터 '잠산'은 첨 듣는 이름인데 집에 와서 검색해보니 업계에선 꽤 유명한 사람인데 나만 모르고 있었나 보다. 이 사람의 책 <더 일러스트>를 영풍문고 새로나온 미술코너에서 보고 입이 벌어졌다. 환상적이고 투명한 수채화풍 그림이 어찌나 이쁜지 어떻게 이런 그림쟁이를 모르고 살아왔을까, 한숨을 쉬었다. 책을 사서 자세히 읽어보니 잠산이라는 사람은 태블릿과 '페인터' 프로그램을 이용해 컴퓨터로 수채화풍 손맛을 살리는 일러스트로 유명했고, 그를 따라하려는 추종자&모방자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됐다. 태블릿과 페인터 프로그램을 사용하면 나도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궁금하다. 펭귄도령도 페인터 프로그램에 도전하고 싶다며 이 기회에 태블릿을 사자고 거들었다. 그리하여 태블릿 2개월 무료 체험 사용 신청을 했다. 태블릿 회사에서 '일단 시험 사용해 보고 좋으면 사라'는 마케팅의 일환으로 무료사용 신청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더 일러스트>

태블릿과 페인터 프로그램을 이용해 그림을 그리면 종이와 연필뿐만 아니라 물감이나 마카 등의 채색도구도 필요가 없어진다. 잘못 그리면 지우고 다시 그릴 수도 있다. 손 그림만이 전부였던 내겐 충격이다. 그림을 그린다면서 이런 세상이 있는 줄 몰랐다니, 잠산이라는 일러스트레이터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페인터 프로그램은 다루기 어려운 툴로 소문나 있어서 뽀샵질조차 못하는 나 같은 초보자가 도전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서지만 이왕 저질러진 물이니 어찌할 도리가 없다. 돌격 앞으로~! 하는 길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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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Ѽ탐닉2012/01/28 18:22




후지와라신야 사진집과 에세이집 3권을 한꺼번에 읽었다. 사진이 많은 순서로 늘어놓으면 <메멘토모리>(사진 90%), <여행의 순간들>(사진 40%), <돌아보면 언제나 네가 있었다>(사진10%) 순이고, 글이 많은 순서로 늘어놓으면 그 반대다. 나는 사진이 많은 책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가장 좋았던 책은 두 번째로 읽은 <여행의 순간들>이다.

후지와라신야는 장정일이 추천한 <황천의 개>라는 에세이를 통해 알게 된 작가인데 요즘 서점에 가면 이 양반의 신간 <인생의 낮잠>이라는 사진에세이집이 놓여 있는 등 요즘 들어 자주 눈에 보인다. 한국 출판계에서 드뎌 이 양반의 진가를 알아차렸나? <인생의 낮잠>도 조만간 읽어볼 테지만 후지와라신야의 글은 벌써 4권째 읽는데도 질리지 않는다. 비슷비슷한 에세이와 비슷비슷한 사진집인데도 책마다 포맷이 약간씩 다르고 이야기가 겹치는 부분이 없기 때문인데, 꼭 그것만은 아닐 거라 짐작하지만 정확한 이유는 글쎄다. 뭐라 말하기가 어렵다. 글이 좋고 그가 다루는 에피소드들이 매력적이라는 것?

<여행의 순간들>이 좋았던 건 글이 간결하면서도 울림이 깊고 <황천의 개>를 읽었을 때 만난 '신세계를 발견하는 느낌'과 비슷한 신선함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책은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만난 사람들과 특정한 사건을 경험했던 얘기들이 주를 이루고 그와 관련한 사진 몇 점이 간간이 끼어 있는 보통의 사진에세이 형식인데 주로 동아시아 여행 얘기가 많다. 헌데 내용을 읽어보면 그가 겪은 에피소드들이 대부분 놀랍고 충격적이라서 '이런 일들을 지은이가 실제 다 겪었던 말인가?' 묻고 싶어진다. 내용이 정말로 범상치 않고 그에 얽힌 깨달음도 일반적인 에세이에선 보기 힘든 것들이다. 

부산 여행할 때 어느 횟집에서 관광객을 등쳐먹는 횟집 주인과 싸운 얘기는 같은 한국사람으로서 얼굴이 화끈거렸고, 목포 여행 중에 경찰서에 끌려간 이야기도 한국적인 상황이 아니면 일어날 수 없는 얘기라 부끄러웠다. 인도 카스트제도에 대한 생판 처음보는 시각도 놀라웠고(카스트가 오히려 성적소수자 같은 이들에게 사회적응을 쉽게 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측면이 있다는 시각), 이슬람 국가들의 억압적인 성문화 실태는 처음 접하는 얘기라 충격을 받았고, 꽃을 미끼로 사용해 '구라미'라는 물고기를 잡은 얘기는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신선한 얘기였다. 꽃을 먹는 물고기라니, 그걸 잡기 위해 꽃을 낚싯밥 삼아 낚시를 하다니, 놀라워라.

관광객을 쫓아다니는 스토커 얘기도 첨 듣는 얘기였고, 미국으로 망명을 기도하다가 바다에서 죽는 쿠바인들 얘기, <노인과 바다>의 실제인물을 만나러 가서 겪은 황당한 체험, 헤밍웨이에 대한 단상들, 로스앤젤레스 거리에서 목격한 만취여성 총격사건, 텍사스 도넛가게에서 있었던 일, 미국을 여행할 때 타고 다녔던 캠핑카 관련 얘기 등등 하나 같이 이색적이고 인상적인 에피소드들이 즐비하다. 책을 덮으면 후지와라신야가 겪은 에피소드들로 인한 잔상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후폭풍에 시달리게 된다. 만약 내가 그 자리에 있으면서 그 사건을 직접 겪었다면 어떻게 대처했을까? 따위의 질문을 던지며 몸서리를 치거나 조바심을 내게 되는 것이다. 감정이입을 너무 많이 했을까.

후지와라신야는 예술대학 미술과를 다니다 중퇴하고 카메라를 들고 인도로 떠났다가 인도 사진집 <인도방랑>을 출간했다. 그게 일본에서 폭발적 인기를 얻으면서 사진작가겸 에세이스트로 이름을 높였다. 나는 사진에 대해선 잘 모르기 땜에 죽음을 주제로 삼은 그의 사진집 <메멘토모리>를 보면서도 '오, 사진 멋진데!' 같은 감탄 이상은 할 수가 없었다. 펭귄도령은 사진집을 보면 영감을 받아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느라 책장을 넘기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하는데 나는 한 사진에 오래 머물러봤자 고작 30초 정도?에 불과한 사진 무관심자다. <메멘토모리>는 사진작가들에겐 어떤 대접을 받는 책인지 모르겠으나 내겐 '멋지다'는 느낌 말고는 딱히 할 말이 생각 안나는 보통의 사진집이었다. 

사진보다 에세이가 주를 이룬 <돌아보면 언제나 네가 있었다>는 여행관련 에세이가 아니고 일본에서 겪은 이런저런 일상에 관한 에세인데 주로 어떤 인물을 만난 얘기가 주를 이룬다. 일상 중에 만난 비일상적인 만남을 디테일하게 그린, 여운이 긴 촉촉한 경수필이다. 서정적이고 독특하며 감상적이면서도 절제된, 한마디로 무척 일본적인 느낌의 글이다. 많은 만남들이 언급되고 소개되는데 그 만남들의 결과가 한마디로 '자신을 희생하는 것의 아름다움'이랄까, 하는 것들이라서 '일본적'이라는 느낌을 안 가질 수가 없었다.

<여행의 순간들>에 등장하는 에피소드 가운데 소녀들 모아놓고 사진집을 찍을 때 겪은 이야기가 생각난다. 10대 소녀 몇을 세워놓고 사진을 찍는데 어느 순간 소녀들의 눈빛이 미묘하게 달라지는 걸 눈치 채고 그걸 카메라에 마구 담았다고 한다. 헌데 그 순간 피사체인 소녀들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변화를 체험했다고 털어놓았다는 것이다. 후지와라신야는 그 경험 중에 '시선이 대상을 변화시킨다'는 사실을 자각했다고 한다. 사진에 대해 아무 경험이 없는 나였지만 그 이야기는 무척이나 매혹적이었다. 셔터를 누르는 자와 피사체가 동시에 미묘한 변화를 체험하는 그런 경험이라니, 그런 경험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고 설령 경험한다고 해도 독자가 공감할 수 있도록 표현하는 것도 어렵다. 근데 후지와라신야는 그 두가지를 동시에 한다. 그런 점에서 <여행의 순간들>은 후지와라신야의 다른 책보다 훨씬 독창적이고 근사하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바쁜 와중에도 후지와라신야를 읽고 싶어진다면 꼭 <여행의 순간들>을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물론 <황천의 개>를 읽은 다음이라면 젤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해도 이 책은 그 자체로 읽기에 좋다. 나처럼 여행을 즐기지 않거나 여행에세이 읽는 걸 그닥 안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후지와라신야의 여행기에서만큼은 놀라움을 느끼게 될 거라고 확신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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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Ѽ탐닉2012/01/27 14:39


김현진 새 에세이 <뜨겁게 안녕>을 마침내 다 읽었다. 제목이 지나치게 감상적이고 통속적이라 '이거 뭐지?' 싶었는데 책을 다 읽고났더니 트로트 가요 같은 책 제목이 끄덕끄덕 이해가 가더라. 뜨겁다 못해 폭발할 것 같은 김현진의 20대는 이제 안녕인가? 알콜과 결별한 모습으로 30대를 맞은 김현진의 앞날에 축하와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술과 함께한 뜨거웠던 날들이 세월 속으로 사라진다고 생각하면 시원한 맘 뒤끝에 이상한 섭섭함이 남는다. 그녀의 이웃도 친구도 아무 것도 아닌 주제에 이 무슨 야릇함인지.

책을 덮은 뒤 밀려오는 회색빛 정서를 어쩌지 못해 그림을 그렸는데, 그리다보니 박인환 시인의 시 <목마와 숙녀>가 떠올랐다. 아는 시가 몇 개 없다보니.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등의 구절들은 김현진 글을 읽으면서 내가 느꼈던 울컥하는 정서를 압축적으로 재현해놓았다. <목마와 숙녀> 중에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이란 구절밖에 외우고 있지 못하던 나는 인터넷을 뒤져 나머지 구절들을 알아냈고 결국 김현진의 <뜨겁게 안녕>이 <목마와 숙녀>의 정서와 깊이 맞닿아 있음을 갈파했다. 

그러므로 물기 많은 촉촉한 감상글을 싫어하는 사람, 예민하고 섬세한 자기애를 가진 저자의 좌충우돌을 한심하고 부도덕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안 읽는 게 좋다. 가난이라면 뒤돌아보기조차 싫은 징글징글한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읽기 금지. 혹은 알콜중독 같은 중독자의 정서를 혐오하는 바른생활맨인 경우 김현진 글을 읽다가 어줍잖은 우월감에 사로잡힐 가능성이 높으므로 피하는 게 좋겠다.

김현진은 20대 내내 '애타게 사랑하는 누군가를 찾아서' 헤맨다. 골목을 헤매고 술집을 헤매고 가난한 자취방과 재개발 구역을 헤맨다. 떠돌고 또 떠돈다. 술병에 쳐담궈진 아리까리한 알콜 기운으로 말이다. 20대엔 연애와 여행을 하라고 권하는 김어준 말마따나 김현진이 술 대신 여행을 택했다면 어땠을까. 그냥 연애만 하더라도 자신의 바닥을 가감 없이 만나게 되는 법인데 술통에 빠진 채 연애를 해댄 김현진은 바닥이 아니라 바닥에 바닥을 지나 아예 땅을 뚫고 지하로 내려간 지점까지 도달한다. 당연히 그녀가 원하는 사랑은 만날 길이 없고, 그녀가 찾아 헤매던 상대는 어디에서도 만나지 못한다. 바닥 마이너스 지점엔 외롭고 지친, 돌이키기조차 부끄러운 초라한 자기 자신의 맨살 이외엔 아무 것도 없다.


하지만 김현진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눈이 부실만큼 솔직하고 당당하다. 진창을 구르며 느낀 자기연민과 자기혐오를 고스란히 털어놓고서 뜨거웠던 20대와 술에 작별을 고한다. 제목 그대로 뜨겁게 안녕이다. 줄곧 김현진을 응원하고 김현진의 글을 기다려 온 애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이번에도 아낌 없는 응원과 격려를 보내며 또다시 조바심 나는 맘으로 다음 책을 기다린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똑똑하면서도 연약한, 당차면서도 사랑에 목마른 김현진이 가난한 서울 변두리에서 독립된 삶을 꾸려나가는 일의 팍팍함과 고됨을 온몸으로 겪어나가는 얘길 읽는 동안 몇번이고 '제발 굴하지마! 결국 이겨낼거야! 화이팅!'을 외쳤으니 그녀의 다음 책을 기다릴 자격이 있는 거겠지? 

부모 빽도 없고 인맥도 없고 가진 것이라곤 맨몸뚱이 하나뿐인 자퇴소녀의 모습이 오버랩되어 더욱 그랬을 것이다. 응원하고 지켜볼 수는 있어도 도와줄 방법이라곤 없는 입장이라 더더욱. 자퇴소녀와 20대의 김현진 둘에게 공통적으로 안타까운 것은, 왜 그토록 명민하고 어여쁜 아가씨가 자기 자신을 비하하고 사랑하지 못하는지,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수용하질 못하는지, 왜 자존감이 바닥을 박박 기는지에 대한 의문이다. 아마도 부모와 부모 아닌 타자로부터 무조건적인, 온전한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애정결핍 때문일 거라 추측한다. 헌데 그런 애정결핍은 아무리 술을 먹고 담배를 피우고 자학질을 해도 채워지지 않을 뿐더러 자기 몸만 지치게 한다. 20대 내내 술통에 빠져 헤맸던 김현진은 자학질 습관으로부터 차츰 벗어나는 중인 듯하나 이제 막 20대에 진입한 자퇴소녀는 자학질과 자기 몸 지치게 하기 프로젝트에 발을 담그기 시작한 신입이라는 사실이 못내 맘에 걸린다. 안타까운 노릇이다.

내가 김현진을 미더워하는 것은 솔직하게 털어놓기 힘든 구차한 부분까지 몽땅 털어놓고 그게 자기 자신의 일부임을 고스란히 인정하는 용기 때문이다. 그녀는 분명 자신의 벗어놓은 허물과 껍질을 딛고 또다른 삶을 씩씩하게 살 것이고 더이상은 세상을 향해 징징대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갖게 한다. 내가 바라는 건, 김현진 20대 못지 않은 피폐함에 질질 끌려다녔던 내 인생에 펭귄도령이 짠하고 출현해 새로운 삶을 만났듯, 30대에 진입한 김현진에게도 그녀의 지친 영혼을 위무하고 소통할 수 있는 짝이 출현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술통에 빠졌던 세월조차 웃으며 회고할 수 있도록 만드는, 맘이 따뜻하고 품이 넉넉한 사람으로 말이다. 그때까지 현진아, 억세게 버티고 꿋꿋하게 살아 있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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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Ѽ늦잠2012/01/26 12:29


집 근처 프리머스 시네마에서 <부러진 화살>을 봤다. CGV 체인에서 이 영화를 상영하지 않는 걸 알고는 꼭 봐야겠다는 오기가 더욱 발동했다. 예매를 하고 갔기 망정이지 하마터면 못 볼 뻔했다. 설 연휴 뒤끝이라 동네 극장인데도 매진사례였다. 보고나면 화가 난다는 얘길 듣긴 들었으나 아아! 정말이지 어찌나 화가 나든지 혈압 오르고 가슴 답답하고 입에서는 거친 욕설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평소 고혈압이나 화병 증상이 있는 분들 중 정의와 상식에 대해 예민한 촉수를 가진 이는 영화 보러갈 때 우황청심환 같은 예방약을 준비해가는 게 좋을 것이다. 나와 펭귄도령은 영화를 보고 난 후 터질 듯한 울화를 해소할 길 없어 대낮부터 마주앉아 모과주를 들이마시고 뻗어버렸다. 

문명이 법을 발명하고 법의 필요성을 심어놓은 건 어찌할 수 없다쳐도 법은 있는듯 없는듯 최소한인 게 좋다. 그리하여 법이 무르익을수록 정의로운 사회가 가까워져야 마땅하거늘 한국의 법치주의는 법을 집행하는 이들조차 법을 개무시하고 법법법거리면서 법 위를 기고 나르는 치외법권 계층만을 보호하는 구릴대로 구린, 썩을대로 썩은, 법치 아닌 역치로 변질됐다. 냄새가 진동한다.

스파이더맨 삼촌은 스파이더맨에게 '힘은 올바른 곳에 써야 한다'고 유언을 남긴다. 당연하게도 많이 가진 자, 많이 아는 자는 그 힘을 정의를 지키고 상식을 수호하는 일에 써야 한다. 그게 보수의 가치다. <부러진 화살>은 한국에 보수가 존재하지 않을 뿐더러 보수의 가치가 땅에 떨어져 존중받지 못하고 있음을 묘파하는 영화다. 자신에게 주어진 힘과 능력을 자기 기득권 지키는 데 쓰기 급급한 지금의 한국 사회 권력층은 보수가 아니라 '수구 꼴통'에 불과하다. 썩은 권력층의 심장을 겨눈 석궁 교수의 화살은 부러지지 않고 명중했어야 했다.
법치주의라는 미명 아래 법치를 말살하고 기득권에 기생하는 버러지 같은 넘들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고대인들의 불화살을 맞아 봐야 한다. 그거야말로 법에 가려진 화끈한 정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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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칠Ѽ놀이2012/01/24 13:26



펭귄도령이 어제 그린 클레이아트 배경 그림. 왼쪽은 스케치한 것이고 오른쪽은 실제로 칠한 사진이다. 펭귄도령이 젤 좋아하는 카키색과 내가 젤 좋아하는 보라색을 조화롭게 배치한 그림인데 이 그림엔 펭귄도령이 만든 '이야기'가 담겨 있다. 카키색을 좋아하는 펭귄도령이 어느 날 보라색을 좋아하는 룰루를 만난다. 보라낭자는 카키도령을, 카키도령은 보라낭자를 닮아가던 끝에 어여쁜 꽃 한송이가 탄생한다는 이야기다. 한마디로 펭귄도령이 룰루낭자를 만난 이후 새롭게 변모한 자신의 모습을 형상화한 그림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정성껏 완성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는 건 정말 흐뭇한 일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흠뻑 빠진 모습, 자신만의 이야기를 완성하려는 극도의 집중력, 그런 것들이 뿜어내는 분위기가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영특하고 센서티브한 총각을 키워서 잡아먹은ㅋ 아줌마'만이 느낄 수 있는 오르가슴 혹은 뿌듯함에 흠뻑 취하고 말았다.ㅎ 처음엔 질투 나서 안 올리려고 했다가 금세 맘을 바꿨다. 보면 볼수록 색감이 너무 이뻐서 나 혼자 감상하기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그림 위에 클레이로 만든 인형과 갖가지 장식들을 붙이게 되면 학원에서 요구하는 클레이아트가 돼버리겠지만 클레이아트가 되기 전에 순전히 펭귄도령만의 이야기가 담긴 펭귄도령만의 작품을 남기고 싶어서 여기에 올려 둔다. 이 작품은 스티로폼 위에 두 언덕 모양의 스티로폼을 붙이고(언덕을 만들기 위해 스티로폼을 열심히 사포질), 거기에 아크릴 물감으로 각각 보라색과 카키색을 칠한 다음 클림트 동심원 문양과 노란 별반짝임 무늬를 첨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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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칠Ѽ놀이2012/01/23 17:31


늦잠을 자고 있는데 전화가 띠리리링~ 온다. 자퇴소녀와 부모님 모두 '설날 아침에 늦잠을 자느냐'고 잔소리를 한다. 차례 지낼 일 없으니 늦잠 좀 자는 걸 갖고 쳇! 어쨌든 전화 덕분에 일어나 동태전을 지지고 떡국을 끓여 우리 나름의 설을 쇴다. 그리고는 잠을 보충하기 위해 다시 낮잠 삼매경에 빠졌다.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 펭귄도령은 클레이아트 새 작품을 만들기 위한 밑그림을 그리고 나는 곁에서 열기구 그림을 색칠했다. 펭귄도령이 아크릴 물감으로 수채화 느낌 물씬 풍기는 멋드러진 그림을 그리고 있는 동안 알록달록한 마카펜으로 열기구를 색칠하고 있자니 내가 마치 유치원생처럼 느껴졌다. 딱 봐도 내 그림은 애기 그림, 펭귄 그림은 전문가 솜씨 같다. 질투에 눈이 먼 나는 펭귄도령 그림을 블로그에 올리지 않기로 결심했다. 비교 당하기 싫으니까 흥!  

설 분위기 내기 위해 생협에서 식혜를 비롯해 명절 음식 몇 가지를 주문했다. 많이 주문하지도 않았는데 아무리 먹어도 줄어들 기미가 안 보인다. 엄마가 준 LA 갈비도 재워져 있고, 펭귄도령 회사에서 설 선물로 준 안동 간고등어도 잔뜩 쌓여 있고, 바구니엔 삶은 고구마, 티라미수 컵케익 남은 것, 아포카토용 바닐라 아이스크림, 떡국 남은 것, 스팸으로 만든 전과 동태전, 두부전, 과일, 티라미수 컵케익 만들 때 쓰고 남은 휘핑 생크림, 냉동실에 잠자고 있는 오리간장불고기, 통밀또띠아와 재료들, 간식용으로 산 볶은 땅콩과 검은깨 두부스낵, 드라이피니시 맥주와 모과주, 안주용 쥐포....등등 이리 봐도 먹을거리, 저리 봐도 먹을거리다. 예전에는 입이 짧아서 먹을거리에 별반 관심을 안 두고도 잘 살았는데, 서울에 올라온 뒤로는 먹을 것에 대한 관심이 급등해 주변에 먹을거리가 많으면 부자가 된 듯 행복해지는 병증(!)에 걸렸다. 그래서 먹을거리가 넘치는 따뜻한 옥탑방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뒹굴뒹굴하며 실컷 먹고 자고 그림 그리는 이 설날 연휴의 안락함이 너무 만족스럽고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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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칠Ѽ놀이2012/01/22 18:14


책을 읽고 나서 좋으면 좋았다고 쓰고 별로인 건 별로라고 써야 직성이 풀렸으니 호불호를 떠나 독서감상문 쓰기를 즐겼던 이가 바로 나라는 사람이었다. 읽은 책들에 대해 숙제하듯 빠짐없이 감상문을 쓰던 한때의 나는 누구였을까. 독서감상문이란, 책에 대한 존중과 글에 대한 존중과 저자에 대한 존중을 표현하는 수단이라고 믿었던 내 일부분이었겠지. 이제 책을 읽는 족족 감상문을 쓰던 시절은 내게서 지나간 듯하다. 요즘은 눈에 바람이 들어갔는지 읽고 나서 별로라는 생각이 들면 감상문은커녕 내가 그 책을 읽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싶어 블로그에 책 제목 정도만 간략하게 언급하고 만다. 아예 언급 안 하고 넘어가는 경우도 많다. 앞으로도 느낌이 좋았거나 타인에게 추천해도 괜찮겠다 싶은 책에 대해서만 감상문을 쓸 참인데, 언제부터, 무엇 때문에, 책에 대해 이런 식의 오만방자한 태도를 가지게 됐는지 궁금하다. 무엇보다 책과 글과 저자에 대한 존중을 잃어버린(놓아버린?) 결과일 것이고, 그 원인은 글의 힘을 신봉하는 텍스트주의자 우석훈과 직접 대면했던 습작당 경험이 크게 작용했으리라고 본다. 그 전까지만 해도 책을 쓰는 '저자'에 대한 판타지가 꽤 공고했었는데 습작당 덕분에 요즘은 그게 거의 사라졌다. 잘됐다면 잘된 일이다. 며칠 전부터 5-6권의 책을 차례로 읽고 있는데 어떤 책이 좋고 어떤 책이 별로인지 너무도 확실하게 느껴져서 내 스스로가 당황스러울 정도다. 책이라면 무조건 좋아했고 별로인 책이라도 한두 가지 정도는 건질 게 있다고 굳게 믿는 '확고한 책편향'이었던 내가 남들에게 추천할만한 책은 세상에 그닥 많지 않다고 믿는 '까탈스런 책 감식안의 소유자'로 바뀌고 있다. 취향이 확실해졌단 얘기고 늙어간다는 증거겠지만, 현기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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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칠Ѽ놀이2012/01/21 15:07



강남교보에서 김현진 새 에세이 <뜨겁게 안녕>을 읽다가 펭귄도령 학원이 끝나는 통에 뒷부분 50여 페이지를 남겨두고 아쉽게 일어섰다. 글이 어찌나 좋은지 중간에 읽기를 멈추고 일어서기가 싫었지만 어쩌는 수가 없었다. 다음 날 집주변에 있는 서점에 가서 못 읽은 부분을 마저 읽으려고 지도를 샅샅이 검색했으나 서점의 '서'자도 발견 못했다. 절망하려던 찰나 집근처 홈플러스에 서적 코너가 있다는 걸 알고 단걸음에 날아갔다. 홈플러스는 커피 살 때 외엔 발걸음을 안하는 곳이지만 서점이 있다는 데야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부푼 기대를 안고 홈플러스 서적코너에 도착한 나는 경악과 허탈에 사로잡혀 의자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말해 무엇하겠나, 기대를 품은 내가 잘못이지. 스티브잡스 전기와 <닥치고 정치>가 놓여 있었으니 서점은 서점이었다. 단지 내가 찾는 김현진 책과 기타 등등 다른 무수한 책들이 없었다는 것 이외에 내가 딱히 실망할 이유는 없다. 문제는 마트 서적코너에서 신간서적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한 내가 순진하고도 멍청하다는 거. 그 사실에 심하게 충격을 먹은 나는 다리에 힘이 풀리고 눈이 가물가물해져서 제대로 서 있기가 힘들었다. 커피코너에 가면 라틴아메리카와 미국, 영국, 이탈리아, 아프리카 등지에서 수입한 싸고 용량 많은 커피 종류들이 즐비하고 네팔산 공정무역 커피까지 갖춰놓는, 철저하게 소비자 입맛을 우선하는 대형마트에서 아무도 돌보지 않는 잡초밭처럼 황량하고 텅 비어 있는 서적코너를 발견하는 기분이라니.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그런 곳에 서적코너라는 이름을 붙여놓는 뻔뻔한 얼굴의 소유자가 바로 자본주의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나는 의자에 주저앉아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내가 사는 곳은 이런 곳이다. 원하는 것은 없고 원하지 않는 것만 사라고 권하는 잉여와 낭비의 세상.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하마터면 눈물이 나올 거 같아 황급히 일어나 마트를 나왔다. 1층까지 걸어나오는 길에도 온갖 종류의 상품들과 온갖 종류의 의류 메이커들과 갖가지 식품들이 즐비했다. 왜 저토록 많이 쌓여 있는 물건들은 하나도 갖고 싶지 않고 이름 모를 잡초 같은 책 한 권이 이토록 읽고 싶은 걸까. 집에 돌아오는 내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김중혁의 <미스터 모노레일>은 영화로 치면 <인디아나 존스> 같은 모험담이다. 우연히 말려든 사건에서 발을 못 빼고 점점 깊이 발을 담그다가 결국 사건의 마무리를 만나게 되는 미스테리 기법을 사용하기 땜에 읽는 내내 스릴감 있다. 가끔 근사한 잠언 같은 것도 나오고, 허구인데도 실제처럼 여겨지는 트릭들도 자주 나와서 읽는 재미가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게임과 현실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것처럼 보이는 플롯도 썩 나빠보이지 않는다. 첫 장편 <좀비들>에 비하면 좀더 괜찮은 느낌이 들어서 세 번째 장편에서는 더 괜찮은 얘기가 나오리라는 기대도 하게 된다. 좋았던 점은 여기까지. 나빴던 점은 어제 읽은 배명훈의 <신의 궤도>와 왜케 유사한지 깜짝깜짝 놀라게 되더라는 점이다. 신과 종교에 관한 얘기, 우주가 어쩌고 하는 추상적인 얘기들....좋다. 많은 남정네들이(혹은 총각 작가들이) 그런 영역에 관심 많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안다. 하지만 우연히 집어든 소설 두 권에서 비슷한 세계관을 발견하니 '허허 참' 소리밖에 안 나온다. 내가 아는 소설이란 '작은 이야기'거나 '저잣거리의 소소한 얘기들'이다. 종교나 우주에 관한 거대담론이 궁금했다면 철학이나 물리 관련 책을 읽었을 터. 내가 소설에서 원하는 것은 시시하고 시시해서 너무도 사소한 이야기거나 편협하고 강박적이어서 비비꼬여 있을지언정 미세하게 감정의 뇌관을 건드리는, 정말이지 하찮고 작은 잡담들이다. 많은 남정네들 혹은 총각작가들이 큰 스케일로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에 매달리는 걸 보면 안타깝고 애석하다. 무라카미하루키의 영향일까 요즘 한국문단의 트렌드일까. 신이 어쩌고 하는 소설을 읽느니 그 시간에 차라리 자퇴소녀랑 맥주 놓고 마주앉아 알바하면서 느끼는 고충을 듣는 편이 훨씬 유익할 거라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나는 어쩌지 못하는 산문 취향인가 보다. 이렇게 써놓고보니 미처 못 읽은 김현진 에세이 끝부분이 더욱 궁금해진다. 알라딘에서 주문하든지 전철 타고 큰 서점엘 가든지 해야겠다. 못 참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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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칠Ѽ놀이2012/01/20 12:45


내가 잘 못 그리는 그림이 한두 개가 아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원은 어떻게 해도 잘 그릴 수가 없다. 항상 찌그러지거나 원 오른쪽 부근이 불룩 튀어나오거나 그렇다. 원을 못 그려서 낑낑거리고 있는 내게 펭귄도령이 원 그리는 팁을 하나 알려줬다. 참고로 펭귄도령은 뭘 대고 그리지 않아도 직선이나 원을 완벽하게 그리는 치밀한 손끝의 소유자. 펭귄도령이 알려준 팁이란, 우선 네모를 그린 후 그걸 4등분한 다음 동그라미를 연결하면 그럭저럭 모나지 않은 원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후 그 팁대로 원을 그리고 있는데 팁대로 하기 전보다는 나아졌지만 역시나 찌그러진 원을 그리는 건 여전하다. 어제 전철 타고 오다가 광고판에 나침반이 있는 걸 보고 꽂혀서 집에 와서 나침반 그림을 그리는데 도무지 원이 예쁘게 그려지지 않았다. 컵을 대고 따라 그려볼까 생각했지만 '찌그러지더라도 그냥 내 손으로 연습하자'고 고집 부리면서 펭귄도령이 알려준 팁대로 원을 그리고 나침반을 그렸다. 내가 왜 이때껏 나침반 생각을 못했는지, 이미지클릭 사이트에서 이쁘고 근사한 나침반 사진들 구경하면서 침을 질질 흘렸다. 완전 신세계다. 내가 좀더 완벽하게 원을 그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면 나침반 분위기 잘 살린 멋진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텐데, 아쉽기만 하다. 그래도 어쨌든 시작이 반이니까.

배명훈 장편소설 <신의 궤도>1,2권을 다 읽었는데 소감으로 딱히 쓸말이 없다. 쩝! 하고 입맛만 다시고 있을 뿐이다. 읽은 시간을 후회한다는 말까진 하고 싶지 않다. 작가가 얼마나 어렵게 자료를 구하고 머리를 쥐어싸매 가면서 소설을 썼을지 눈에 훤히 보이므로. 뭐, 내 취향이 아니어서 그런 것이니 나와 다른 취향을 가진 작가가 무슨 잘못이랴. 하도 여기저기서 배명훈을 추켜세우는 글들이 있길래 처음부터 안 땡겼지만(내 취향은 SF가 아니라서) 한번 읽어나 보자는 심정이었던 것이다(표지는 이뻤다). 끝까지 읽긴 읽었지만 읽는 동안에도 읽고 난 후에도 '이런 글을 왜 썼을까?' 궁금한 마음밖에 없다. 신에 대한 얘기도 그냥저냥이고, 전쟁에 관련한 대목도 별로 안 땡기고, 주인공 남녀는 서로 사랑을 하는 걸까? 의구심만 들고, 자꾸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가 머리 속에서 뱅뱅 돌았다. 플롯이 황당해서 그런 건 아니다. 작가의 우주적 상상력에 대해서도 관심 없는 분야라 노코멘트. 단지 얘기가 우주적이건 전지구적이건 뭐가 됐든 이야기를 다 읽고 났는데도 내 가슴을 두드리는 뭔가가 없었다는 점만 얘기해 두련다. 저자와 소설에 대한 폄하가 아니다. 단순한 취향의 차이이길 바란다. 빌려다놓은 김중혁의 <미스터 모노레일>도 이제 막 읽기 시작했는데 배명훈과 비슷한 '지적이고 논리적인 엘리트 총각 저자'의 책이라 읽고나서 <신의 궤도>와 비슷하게 허탈한 느낌에 사로잡힐까봐 슬몃 걱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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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칠Ѽ놀이2012/01/19 12:19


*이번에는 열기구에 살짝 꽂힌 거 같다. 시리즈로 계속해 볼 생각에 일단 번호는 붙여놨는데 하다가 싫증나면 슬그머니 그만 둘 확률 98%.

*빨간색 계통을 이쁘게 잘 칠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 빨간색 계통은 대부분 촌스러운 느낌이 나기 때문에 이렇게 칠해봐도 별로고 저렇게 칠해봐도 별로라 칠하는 걸 기피하게 된다. 나는 마카펜세트 120색을 골고루 닳아지게 하고 싶은 욕심이 있다. 특정한 색깔만 편파적으로 닳아지게 하지 않고 골고루 균형 있게 닳아뜨려서 훗날 마카펜세트 전체를 새로 구입하는 것이 꿈이라면 꿈이다. 칠하다보면 빨간색을 이쁘게 칠하는 방편이나 쓱쓱 잘 다루는 기술 같은 걸 터득할 날이 오겠지.

*펭귄도령 학원 따라간 김에 강남 교보문고엘 갔다(이젠 일상이 됐다). 이미지 관련 서적 구경하는 거 잠시 미루고, 신간 산문집 코너를 샅샅이 뒤졌다. 읽고 싶은 책이 엄청 많았다. 젤 눈에 띈 건 김현진의 새 책 <뜨겁게 안녕>. 엘리자베스워첼의 우울증 극복기 <프로작네이션>도 흥미를 자극했고, <박재동의 손바닥 아트>는 당장 사고 싶었고, 몸에 관한 책 <내 안에 남자가 숨어 있다>(배수아)와 <밀어>(김경주)도 읽어보고 싶었고, 시인 허수경의 <길 모퉁이 중국식당>도 어떤 글일지 궁금했고, 시인 송경동의 <꿈꾸는 자 잡혀간다>도 혹했고, 후지와라신야의 사진에세이 <인생의 낮잠>도 흥미진진할 거 같고, 여성신학자 현경이 이슬람 여성들을 만난 얘기 <신의 정원에 핀 들꽃처럼>도 읽어보고 싶었고, 한겨레 임범 기자의 <내가 만난 술꾼>도 재밌을 거 같고, 독서감상문 <달빛책방>(조안나)과 <밤은 책이다>(이동진)도 뭔 내용일지 궁금하고, 남인숙의 <어쨌거나 남자는 필요하다>와 차우진의 <청춘의 사운드>, 이우일&선현경 부부의 <느려도 좋아, 달라도 좋아> 등도 호기심이 동했다. 그밖에 <카모메 식당의 여자들>(황희연), <책그림책>(헤르타뮐러), <차도르를 벗고 노르웨이 숲으로>(권상윤), <생각의 거울>(미셸투르니에), <눈으로 하는 작별>(롱잉타이), <그래요, 무조건 즐겁게>(임익종), <유럽의 아날로그 책공간>(백창화), <지상아와 새튼이>(문국진), <셰프의 딸>(나카가와히데코), <슬로 러브>(도미니크브라우닝), <뚜껑 열린 한대수>, <내 손 사용법>(마크프라우언펠더), <미녀와 야구>(릴리프랭키), <찰진연애상담소>(천효경), <나한테 미안해서 비행기를 탔다>(오영욱) 등등도 선뜻 손이 가는 책이었다. 목록이 더 있지만 이쯤에서 생략하는 게 좋겠다. 뭘 먼저 읽게 될지, 어떤 책은 읽고 어떤 책은 안 읽게 될지, 나 자신도 무척 궁금하다. 

*이 글 쓰고 있는데 '곽노현 교육감 유죄 인정 벌금 3천만원 선고'라는 기사가 떴다. 뉴스 읽고 분통 터뜨리는 짓 좀 작작 하고 싶은데 또 열이 받는다. 아아, 정말 이 지긋지긋한 넘의 정치검사들, 정치판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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